여행을 할 때, 마음 속 한 켠에는 항상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심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몇 분마다 한 번씩 지도를 확인하고,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선호하게 되며, 가이드 북에 ‘어디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라는 식의 갈테면 가봐라하는 설명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또 여행을 한 달쯤 하게 된 상황에서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붙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게 되고, ‘길 잃으면 대사관에 전화해.’ 같은 배짱도 생기게 돼서 모험을 하는 쪽을 선호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됐건 요즘 같은 정보통신 수준의 지구촌에서는 국제 미아가 돼서 죽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마지막 확신이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 진짜 네덜란드에서 죽을 뻔 했다!
크뢸러-뭘러 부부 내가 꿈 꾼 장면

거리 곳곳에 H&M 광고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른 점심시간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보낼 날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나는 일정을 강행하기로 하고 아펠도른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펠도른이 네덜란드어인 걸 알면서도 발음이 틀릴까봐 차장아저씨가 역이름을 이야기 해 줄때마다 바짝 긴장을 해서 듣고, 그렇게 한 시간쯤을 달려 아펠도른 역에 도착했다. 이제 108번 버스를 타야 할 차례. 네덜란드 교통 요금 시스템은 약간 특이해서 기사 아저씨께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낸 뒤 무슨 마일리지 카드 같은 종이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사 아저씨가 내 발음을 전혀 못 알아듣고 있었다(훈데를로, 호헤 벨루헤-네덜란드어의 N자도 모르는 내가 이걸 어떻게 발음하라고!). 몇 번을 얘기하다가 가이드북을 오려온 게 생각이 나서 아예 가이드 북을 꺼내 글자를 가리켰더니 그제야 도장을 찍어주셨다. 버스를 탄 나는 또 긴장을 하고(네덜란드 시외버스는 정거장 안내 방송이 안 나온다.) 국립공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재빨리 벨을 누르고 내렸다.

국립 공원 한 가운데에 위치한 미술관
공원 입구에는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예쁜 하얀 자전거가 줄지어 있었다. 난 그 날 아침 쇼핑해온 H&M 쇼핑백을 손잡이에 걸고 드디어 이뤄지게 될 나의 꿈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아뿔싸! 난, 자전거를 탈 줄 몰랐던 것이다!!!!! 1학년 때 갔던 M.T에서 자전거를 못 타면서도 굳이 2인용 자전거는 싫다며 1인용 자전거를 타서 동기들 고생시켰던 이후로 자전거 안장에 앉아 본 기억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들 체형에 맞게 만들어진 이 자전거는 엄청 높고 브레이크도 없었다. 결국 5미터도 못 가고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하다가 자전거를 포기하고 다시 공원 입구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공원 입구에서 표 파는 아저씨께 106번 버스(한 시간에 한 대 있는 그 버스!)를 물어보니 방금 지나갔단다. 그리고는 걸어 들어가려면 한 시간이 걸리니 버스를 기다리나 걸어가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공원 주위는 완전 시골이라서 어디 들어가서 기다릴 곳도 없었고 한 시간 후에는 미술관이 닫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라, 어느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도움으로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 호헤 벨루헤 국립공원은 진짜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도시 하나정도 크기의 넓은 평지 숲이다. 가이드 북에 따르면 야생동물들도 살고 있다고 하고, 수십 종류의 나무들도 끝이 없이 이어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갔으면 정말 환상적이었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들도 우리나라 여느 수목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멋진 광경들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그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저씨한테 히딩크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며(결국은 안 했다.), 네덜란드 인들의 친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5일 동안 있었지만 정말 마음씨 좋고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현지인들을 많이 만난 곳이 네덜란드이다.).
이렇게 해서 미술관 문을 닫기 겨우 한 시간 반 전, 나는 마침내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