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의 유럽 미술여행기 - 5. 나, 네덜란드에서 죽을 뻔 했다!

여행을 할 때, 마음 속 한 켠에는 항상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심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몇 분마다 한 번씩 지도를 확인하고,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선호하게 되며, 가이드 북에 ‘어디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라는 식의 갈테면 가봐라하는 설명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또 여행을 한 달쯤 하게 된 상황에서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붙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게 되고, ‘길 잃으면 대사관에 전화해.’ 같은 배짱도 생기게 돼서 모험을 하는 쪽을 선호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됐건 요즘 같은 정보통신 수준의 지구촌에서는 국제 미아가 돼서 죽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마지막 확신이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 진짜 네덜란드에서 죽을 뻔 했다!

크뢸러-뭘러 부부

네덜란드에는 크뢸러-뮐러 뮤지엄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헬레네 뮐러와 안톤 크뢸러 부부의 평생 수집품이 모여 있는 곳으로, 헬레네 여사가 평생 모아온 작품들을 국가에 기증하며 이 아름다운 공공 미술관의 건립을 약속받았다.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개인의 기증으로부터 설립된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컬렉션을 자랑하며 272점의 반 고흐의 작품이 있어, 반 고흐 미술관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내가 ‘아름다운’ 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사용한 이유는 이곳이 숲 속에 있는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꿈은 그런 것이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예쁘게 생긴 하얀 자전거(공원 입구에서 무료로 빌려줌)를 타고, 머릿결을 흩날리며 신나게 숲 속을 달려, 조각 공원 안 야외 뮤지엄 까페에서 한 숨 돌리며 거품 가득한 라떼를 한 잔 마시는 것. 유럽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난 이 낭만적인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날’까지는 그랬다.

내가 꿈 꾼 장면

크뢸러-뮐러 미술관은 어지간한 가이드 북엔 잘 나와 있지도 않을뿐더러, 있다 해도 네비게이션이 장착된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에게만 유용한 설명 정도만 나와 있을 뿐이다. 겨우겨우 찾은 미술관 정보는 얼핏 봐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듯한 여정을 암시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펠도른 역에서 하차(약 한 시간)‣아펠도른에서 108번 버스를 타고 훈데를로 정거장 하차(약 삼십분)‣호헤 벨루헤 국립공원 입구에서 106번 버스를 타거나(한 시간에 한 대 있음), 자전거로 삼십분‣크뢸러-뮐러 미술관 도착. 즉, 내가 묵고 있는 유스호스텔에서 이 한글로도 발음하기 힘든 갖가지 정거장들을 거쳐 내 꿈속에 미술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하루를 전부 소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거리 곳곳에 H&M 광고

그런데 내가 이 미술관을 찾아가기로 한 2006년 11월 9일, 유럽에는 한 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바로 H&M의 빅터&롤프 라인 출시! 10월 말부터 대대적인 광고를 하며 빅터&롤프의 H&M 왕림을 축복하기 위해 유럽은 들떠 있었고, 11월 9일 당일에는 정말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그간 한국 언론으로부터 들어왔던 표현들, ‘장사진을 이루었다.’, ‘출시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 정도의 표현으로는 감히 어림도 없다. 특히 내가 있었던 네덜란드가 빅터와 롤프의 고향이라 암스테르담 H&M은 패션을 사랑하는 언니들의 아비규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들어갔던 시간이 가게를 오픈한지 삼십 분 정도 후였던 것 같은 데, 이미 옷걸이란 옷걸이는 모두 텅텅 비어 있었고, 옷을 손에 넣고 승전보를 울리며 흥분해 있는 언니들과 취재진들이 한 데 얽혀 가게 안은 들어갈 틈도 없는 숨 막히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가끔씩 행거에 걸려 공장에서 갓 나온 옷들이 배달되면 일단 소리를 지르면서 행거가 나오는 쪽으로 달려간다. 디자인, 사이즈 상관없음. 1초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패자가 된다. 1초 안에 순발력을 발휘해 일단 뭐든지 손에 넣고 봐야한다. 벌써 피팅룸은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여서 언니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어서 갈아입더니 맞지 않는 옷은 재빨리 옆사람과 트레이드하는 명민함도 보여주었다. 마트에서 십분 동안의 반짝 세일을 노리는 한국의 아줌마 언니들도 이 네덜란드의 언니들한테는 못 당할 거라는 예감이 반짝하고 드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른 점심시간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보낼 날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나는 일정을 강행하기로 하고 아펠도른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펠도른이 네덜란드어인 걸 알면서도 발음이 틀릴까봐 차장아저씨가 역이름을 이야기 해 줄때마다 바짝 긴장을 해서 듣고, 그렇게 한 시간쯤을 달려 아펠도른 역에 도착했다. 이제 108번 버스를 타야 할 차례. 네덜란드 교통 요금 시스템은 약간 특이해서 기사 아저씨께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낸 뒤 무슨 마일리지 카드 같은 종이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사 아저씨가 내 발음을 전혀 못 알아듣고 있었다(훈데를로, 호헤 벨루헤-네덜란드어의 N자도 모르는 내가 이걸 어떻게 발음하라고!). 몇 번을 얘기하다가 가이드북을 오려온 게 생각이 나서 아예 가이드 북을 꺼내 글자를 가리켰더니 그제야 도장을 찍어주셨다. 버스를 탄 나는 또 긴장을 하고(네덜란드 시외버스는 정거장 안내 방송이 안 나온다.) 국립공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재빨리 벨을 누르고 내렸다.


국립 공원 한 가운데에 위치한 미술관

공원 입구에는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예쁜 하얀 자전거가 줄지어 있었다. 난 그 날 아침 쇼핑해온 H&M 쇼핑백을 손잡이에 걸고 드디어 이뤄지게 될 나의 꿈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아뿔싸! 난, 자전거를 탈 줄 몰랐던 것이다!!!!! 1학년 때 갔던 M.T에서 자전거를 못 타면서도 굳이 2인용 자전거는 싫다며 1인용 자전거를 타서 동기들 고생시켰던 이후로 자전거 안장에 앉아 본 기억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들 체형에 맞게 만들어진 이 자전거는 엄청 높고 브레이크도 없었다. 결국 5미터도 못 가고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하다가 자전거를 포기하고 다시 공원 입구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공원 입구에서 표 파는 아저씨께 106번 버스(한 시간에 한 대 있는 그 버스!)를 물어보니 방금 지나갔단다. 그리고는 걸어 들어가려면 한 시간이 걸리니 버스를 기다리나 걸어가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공원 주위는 완전 시골이라서 어디 들어가서 기다릴 곳도 없었고 한 시간 후에는 미술관이 닫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라, 어느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도움으로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 호헤 벨루헤 국립공원은 진짜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도시 하나정도 크기의 넓은 평지 숲이다. 가이드 북에 따르면 야생동물들도 살고 있다고 하고, 수십 종류의 나무들도 끝이 없이 이어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갔으면 정말 환상적이었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들도 우리나라 여느 수목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멋진 광경들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그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저씨한테 히딩크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며(결국은 안 했다.), 네덜란드 인들의 친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5일 동안 있었지만 정말 마음씨 좋고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현지인들을 많이 만난 곳이 네덜란드이다.).

이렇게 해서 미술관 문을 닫기 겨우 한 시간 반 전, 나는 마침내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다음 호에 계속)


사치


2007/08/13 14:49 | 연재/사치의 유럽미술여행기

  • 조현희

    (다음 호에 계속) 이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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